코로넬 해전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코로넬 해전은 제1차 세계 대전 중 1914년 11월 1일에 칠레 코로넬 해안에서 벌어진 해전이다. 독일 동아시아 함대와 영국 해군 함대가 교전하여 독일 함대가 승리했다. 영국은 굿 홉, 몬머스 2척의 장갑순양함을 잃고 크래독 제독을 포함한 1,660명의 사상자를 냈으며, 독일은 경미한 피해만 입었다. 이 해전의 결과로 영국 해군은 전열을 재정비하고 포클랜드 제도 해전에서 독일 함대를 격파하여 설욕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비오비오주의 역사 - 2010년 칠레 지진
2010년 칠레 지진은 2010년 2월 27일 칠레 중남부 해안에서 발생한 모멘트 규모 8.8의 강진으로, 1960년 발디비아 지진 이후 칠레에서 가장 강력했던 지진이자 역사상 여섯 번째로 강력한 지진으로 기록되었으며, 쓰나미와 막대한 피해, 그리고 지구 전체의 형태 변화에 영향을 미쳤다. - 비오비오주의 역사 - 1960년 콘셉시온 지진
1960년 콘셉시온 지진은 1960년 5월 21일부터 22일까지 칠레 콘셉시온 지역에서 발생한 일련의 지진들을 의미하며, 규모 8.1, 7.1, 7.8의 지진이 연이어 발생하여 지진 해일을 일으켰다.
코로넬 해전 - [전쟁]에 관한 문서 | |
---|---|
위치 정보 | |
기본 정보 | |
전투명 | 코로넬 해전 |
일부 | 제1차 세계 대전 |
날짜 | 1914년 11월 1일 |
장소 | 칠레, 코로넬 앞바다 |
결과 | 독일의 승리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독일 제국 |
교전국 2 | 영국 |
지휘관 | |
독일 지휘관 | 막시밀리안 폰 슈페 중장 |
영국 지휘관 | 크리스토퍼 크래독 소장 (전사) 존 루스 |
병력 | |
독일군 병력 | 장갑순양함 2척 방호순양함 3척 |
영국군 병력 | 장갑순양함 2척 경순양함 1척 보조 순양함 1척 |
사상자 및 손실 | |
독일군 사상자 | 3명 부상 |
영국군 사상자 | 1,660명 사망 장갑순양함 2척 침몰 경순양함 1척 손상 |
관련 전투 및 전역 | |
관련 전역 | 해양 사령부 1914-1917 아시아-태평양 전역 |
그림 | |
![]() | |
![]() | |
![]() |
2. 배경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당시, 독일 제국 해군은 중국 칭다오를 거점으로 동아시아 함대를 운영하고 있었다.[2] 동아시아 함대는 1914년 8월 초 마리아나 제도의 파간 섬에 집결하여 남미를 경유, 본국으로 귀환을 결정했다.[2]
영국 해군은 독일 함대가 태평양 무역로를 위협할 가능성을 인지하고, 이를 격파하기 위해 크리스토퍼 크래독 소장에게 함대를 이끌고 수색에 나서도록 명령했다.[2] 1914년 10월 4일, 영국은 무선 메시지를 통해 슈페가 남아메리카 서해안의 무역로를 공격할 계획임을 알게 되었다.
영국 해군은 크래독 함대에 신형 장갑순양함 디펜스(Defence)를 증원하기로 약속했지만, 이 약속은 번번이 지켜지지 않았다.[4] ''디펜스''호는 한때 크래독을 증원하기 위해 파견되었지만, 중간에 소환되어 지중해로 돌아갔다가 남아메리카 동부 해안을 순찰하는 새로운 함대의 일원으로 다시 파견되는 등 함선 배치 및 사용 방식에 대한 혼선이 있었다.[4]
10월 27일, 윈스턴 처칠은 크래독으로부터 느린 전함 ''카누푸스(Canopus)''호를 남겨두고 나머지 함선들을 이끌고 슈페를 찾을 것이라는 신호를 받았다. 크래독은 여전히 ''디펜스''호 형태의 증원을 기대하고 있었으며, 가능한 한 빨리 그를 따라오도록 명령했다고 밝혔다.[4]
처칠은 크래독에게 ''디펜스''호가 동부 해안에 남아 있을 것이며, 크래독은 자신의 임무에 충분한 전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는 답신을 보냈다. 그러나 ''카누푸스''호를 버릴 그의 계획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다.[4]
크래독은 11월 1일 코로넬에서 ''글래스고(Glasgow)''호가 수집한 메시지와 함께 처칠의 답장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되며, 이는 자신이 기대하는 대로 행동하고 있다는 최종 확인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5]
스탠리를 출발하면서, 크래독은 사망할 경우 헤드워스 뮤에게 전달할 편지를 남겼다. 그는 그 편지에서 적과 교전하지 못한 죄로 군법회의를 기다리고 있던 어니스트 트루브리지의 운명을 당하지 않겠다는 의도를 밝혔다.[5] 포클랜드 총독과 총독 보좌관은 크래독이 생존을 기대하지 않았다고 보고했다.[6]
10월 22일, 크래독은 해군본부에 케이프 혼을 돌아갈 것이며 탄약선을 호위하기 위해 ''카누푸스''함을 남겨둘 것이라는 전문을 보냈다. 10월 27일 존 피셔 제독이 제1해군장관에 취임했고, 다음 날 피셔는 ''카누푸스''함 없이는 슈페와 교전하지 말라는 명령을 크래독에게 내렸다.
11월 3일, 발파라이소에서 슈페가 목격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피셔는 긴급히 ''디펜스''호가 크래독과 합류하도록 명령하고, 다른 함선들과 함께 ''카누푸스''호를 유지할 필요성을 강조했다.[4]
크래독 함대는 상대적으로 낡고 약한 함선들로 구성되었으며, 굿 홉(Good Hope)의 경우 경험이 없는 해군 예비역들이 승무원으로 근무했다.[2] 반면, 막시밀리안 폰 슈페 함대는 우수한 성능의 함선과 숙련된 승무원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2. 1. 영국 해군의 준비 부족
영국 해군은 크래독 함대에 신형 장갑순양함 디펜스(Defence)를 증원하기로 약속했지만, 이 약속은 번번이 지켜지지 않았다.[4] ''디펜스''호는 한때 크래독을 증원하기 위해 파견되었지만, 중간에 소환되어 지중해로 돌아갔다가 남아메리카 동부 해안을 순찰하는 새로운 함대의 일원으로 다시 파견되는 등 함선 배치 및 사용 방식에 대한 혼선이 있었다.[4]10월 27일, 윈스턴 처칠은 크래독으로부터 느린 ''카누푸스(Canopus)''호를 남겨두고 나머지 함선들을 이끌고 슈페를 찾을 것이라는 신호를 받았다. 크래독은 여전히 ''디펜스''호 형태의 증원을 기대하고 있었으며, 가능한 한 빨리 그를 따라오도록 명령했다고 밝혔다.[4]
처칠은 크래독에게 ''디펜스''호가 동부 해안에 남아 있을 것이며, 크래독은 자신의 임무에 충분한 전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는 답신을 보냈다. 그러나 ''카누푸스''호를 버릴 그의 계획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다.[4]
크래독은 11월 1일 코로넬에서 ''글래스고(Glasgow)''호가 수집한 메시지와 함께 처칠의 답장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되며, 이는 자신이 기대하는 대로 행동하고 있다는 최종 확인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5]
스탠리를 출발하면서, 크래독은 사망할 경우 헤드워스 뮤에게 전달할 편지를 남겼다. 그는 그 편지에서 적과 교전하지 못한 죄로 군법회의를 기다리고 있던 어니스트 트루브리지의 운명을 당하지 않겠다는 의도를 밝혔다.[5] 포클랜드 총독과 총독 보좌관은 크래독이 생존을 기대하지 않았다고 보고했다.[6]
10월 22일, 크래독은 해군본부에 케이프 혼을 돌아갈 것이며 탄약선을 호위하기 위해 ''카누푸스''함을 남겨둘 것이라는 전문을 보냈다. 10월 27일 존 피셔 제독이 제1해군장관에 취임했고, 다음 날 피셔는 ''카누푸스''함 없이는 슈페와 교전하지 말라는 명령을 크래독에게 내렸다.[3]
11월 3일, 발파라이소에서 슈페가 목격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피셔는 긴급히 ''디펜스''호가 크래독과 합류하도록 명령하고, 다른 함선들과 함께 ''카누푸스''호를 유지할 필요성을 강조했다.[4]
2. 2. 양측의 전력 비교
2. 2. 1. 영국 해군
- 장갑순양함: HMS 굿 홉(기함), HMS 먼머스
- 경순양함: HMS 글래스고
- 무장 상선: HMS 오트란토
- 구형 전함: HMS 카노푸스 (해전에 불참)
지휘관: 크리스토퍼 크래독 소장
2. 2. 2. 독일 해군
독일 제국 해군의 장갑순양함 SMS 샤른호르스트(Scharnhorst), SMS 그나이제나우(Gneisenau)와 경순양함 SMS 드레스덴(Dresden), SMS 라이프치히(Leipzig), SMS 뉘른베르크(Nürnberg)로 구성된 동아시아 함대는 막시밀리안 폰 슈페 제독의 지휘 하에 있었다. 슈페 제독은 뛰어난 전략과 용맹함으로, 당시 독일 제국 해군 내에서도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3. 해전의 경과
16시 17분, 라이프치히는 다른 독일 함선들과 함께 영국 함선들의 연기를 발견했다.[9] 독일 함대는 영국 함대의 풍상 쪽인 동쪽 육지 쪽에 위치했다. 영국 함대는 독일 함대의 서쪽에 위치하여 태양을 등지고 독일 함대의 조준을 방해하려고 했다.[15] 16시 20분, 글래스고와 오트란토는 북쪽에 연기를 발견하고 19km 거리에 있는 세 척의 함선을 목격했다. 영국 함선들은 방향을 바꿔 두 함대 모두 남쪽으로 이동했고, 90분 동안 추격전이 벌어졌다.[10]
크래독은 26km/h의 속도밖에 내지 못하는 오트란토와 함께 싸우거나, 37km/h의 속도를 낼 수 있는 세 척의 순양함을 가지고 오트란토를 버리고 독일 함선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는 선택의 기로에 섰다.[10] 17시 10분, 크래독은 싸워야 한다고 결정하고 함선들을 더 가까이 모았다. 그는 남동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태양이 높이 떠 있는 동안 독일 함선에 접근하려 했다.[11] 그러나 슈페는 교전을 회피하고 함대 간의 거리를 13,000m로 유지했다.[11] 18시 18분, 크래독은 다시 적함선을 향해 직접 항해하며 접근하려 했지만, 독일 함선들은 다시 16,000m 더 먼 거리로 방향을 돌렸다.[11]
18시 50분, 해가 지자 스페는 11,000m까지 접근하여 사격을 개시했다.[11] 해가 지자 잔광에 영국 함대의 함영이 드러나는 반면, 독일 함대는 배경의 육지에 녹아들어 조준하기 어려워졌다.[15] 독일 함선들은 굿 홉에 장착된 두 개의 234mm 함포와 비슷한 사정거리를 가진 16문의 210mm 함포를 갖추고 있었다. 영국 함선의 나머지 152mm 함포 대부분은 함선 측면의 케이스메이트에 있었는데, 거친 파도 속에서 함포 문을 열고 사격하면 계속해서 물이 침입했다.[12]
영국 함선의 152mm 함포는 독일 함선의 210mm 함포 사정거리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에, 크래독은 독일 함선에 접근하려 했다. 19시 30분, 그는 5,500m까지 접근했지만, 접근할수록 독일 함포의 명중률이 높아졌다.[13] 몬머스는 먼저 함포 사격이 멈췄다. 굿 홉은 계속 사격을 하며 독일 함선에 접근했고, 점점 더 많은 포격을 받았다. 19시 50분, 굿 홉도 사격을 멈췄고, 이후 함선의 선수 부분이 폭발한 후 쪼개져 침몰했으며, 침몰 과정을 목격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13]
샤른호르스트는 몬머스에 사격을 집중한 반면, 그나이제나우는 글래스고와 교전 중이던 라이프치히와 드레스덴에 합류했다.[14] 글래스고 함장인 존 루스(John Luce)는 남아서 싸워도 얻을 것이 없다고 판단하여 사격을 멈췄고, 침몰하고 있던 몬머스로 돌아갔지만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었기에 남쪽으로 방향을 바꿔 출항했다.[14]
뉘른베르크는 전투에 늦게 도착하여 기울어지고 심하게 손상되었지만 여전히 움직이고 있는 몬머스를 발견했다. 뉘른베르크는 함선의 백색기를 조명으로 비추어 항복을 권유했지만 거절당하자 사격을 개시하여 마침내 몬머스호를 침몰시켰다.[15]
3. 1. 전투의 전개
16시 17분, 라이프치히는 다른 독일 함선들과 함께 영국 함선들의 연기를 발견했다.[9] 독일 함대는 영국 함대의 풍상 쪽인 동쪽 육지 쪽에 위치했다. 영국 함대는 독일 함대의 서쪽에 위치하여 태양을 등지고 독일 함대의 조준을 방해하려고 했다.[11] 16시 20분, 글래스고와 오트란토는 북쪽에 연기를 발견하고 거리에 있는 세 척의 함선을 목격했다. 영국 함선들은 방향을 바꿔 두 함대 모두 남쪽으로 이동했고, 90분 동안 추격전이 벌어졌다.[10]크래독은 의 속도밖에 내지 못하는 오트란토와 함께 싸우거나, 의 속도를 낼 수 있는 세 척의 순양함을 가지고 오트란토를 버리고 독일 함선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는 선택의 기로에 섰다.[10] 17시 10분, 크래독은 싸워야 한다고 결정하고 함선들을 더 가까이 모았다. 그는 남동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태양이 높이 떠 있는 동안 독일 함선에 접근하려 했다.[11] 그러나 슈페는 교전을 회피하고 함대 간의 거리를 로 유지했다.[11] 18시 18분, 크래독은 다시 적함선을 향해 직접 항해하며 접근하려 했지만, 독일 함선들은 다시 더 먼 거리로 방향을 돌렸다.[11]
18시 50분, 해가 지자 스페는 까지 접근하여 사격을 개시했다.[11] 해가 지자 잔광에 영국 함대의 함영이 드러나는 반면, 독일 함대는 배경의 육지에 녹아들어 조준하기 어려워졌다.[15] 독일 함선들은 굿 홉에 장착된 두 개의 함포와 비슷한 사정거리를 가진 16문의 함포를 갖추고 있었다. 영국 함선의 나머지 함포 대부분은 함선 측면의 케이스메이트에 있었는데, 거친 파도 속에서 함포 문을 열고 사격하면 계속해서 물이 침입했다.[12]
영국 함선의 함포는 독일 함선의 함포 사정거리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에, 크래독은 독일 함선에 접근하려 했다. 19시 30분, 그는 까지 접근했지만, 접근할수록 독일 함포의 명중률이 높아졌다.[13] 몬머스는 먼저 함포 사격이 멈췄다. 굿 홉은 계속 사격을 하며 독일 함선에 접근했고, 점점 더 많은 포격을 받았다. 19시 50분, 굿 홉도 사격을 멈췄고, 이후 함선의 선수 부분이 폭발한 후 쪼개져 침몰했으며, 침몰 과정을 목격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13]
샤른호르스트는 몬머스에 사격을 집중한 반면, 그나이제나우는 글래스고와 교전 중이던 라이프치히와 드레스덴에 합류했다.[14] 글래스고 함장인 존 루스(John Luce)는 남아서 싸워도 얻을 것이 없다고 판단하여 사격을 멈췄고, 침몰하고 있던 몬머스로 돌아갔지만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었기에 남쪽으로 방향을 바꿔 출항했다.[14]
뉘른베르크는 전투에 늦게 도착하여 기울어지고 심하게 손상되었지만 여전히 움직이고 있는 몬머스를 발견했다. 뉘른베르크는 함선의 백색기를 조명으로 비추어 항복을 권유했지만 거절당하자 사격을 개시하여 마침내 몬머스호를 침몰시켰다.[15]
4. 해전의 결과
코로넬 해전에서 독일 제국 해군은 영국 해군에게 1810년 그랑포르 전투 이후 첫 함대 패배를 안겨주었다.[19] 이 해전으로 영국 해군은 1,660명의 전사자를 냈으며, 크리스토퍼 크래독 소장을 포함한 승무원 전원이 사망했고, 기함 굿 홉과 몬머스가 침몰했다.[23] 반면, 독일 해군은 경미한 피해만 입었다.[23]
영국 해군은 패배의 책임을 물어 관련자들을 문책하고, 더베턴 스터디 제독이 지휘하는 새로운 해군 부대를 편성하여 전함 인빈시블과 인플렉서블을 포함시켰다.[19] 이 부대는 포클랜드 제도 해전에서 막시밀리안 폰 슈페의 함대를 격파하여 코로넬 해전의 패배를 설욕했다.[19]
하원에서 윈스턴 처칠은 크래독 소장이 ''캐너퍼스''와 함께 즉시 교전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빠른 함선만으로 공격하기로 결정했다고 설명했다. 이는 그가 파괴되더라도 적에게 피해를 입히고, 이후 그들의 확실한 파괴로 이어질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22]
전투에서 벗어난 ''글래스고우''는 마젤란 해협을 통과했고, ''캐너퍼스''와 합류하여 포클랜드 제도로 향했다.[19] ''오트란토''는 태평양을 항해한 후 희망봉을 돌아 아브롤호스 암초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았다.[20]
슈페에는 승리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생존 가능성에 대해 비관적이었으며, 영국 해군에 가한 피해에 대해 무관심했다.[21] 그는 발파라이소 항구에서 축하 행사에 참여하기를 거부했고, 꽃다발을 받았을 때 "이것은 내 무덤에 딱 좋겠군"이라고 말했다.[23] 그는 1914년 12월 8일 포클랜드 제도 해전에서 그의 함선과 함께 대부분의 승조원들과 같이 전사했다.
당시 대한제국의 언론은 코로넬 해전의 패배를 상세히 보도하며, 영국 해군의 쇠퇴와 독일 해군의 부상을 강조했다. 이는 대한제국 내에서 해군력 강화에 대한 여론을 더욱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5. 해전의 영향 및 역사적 의의
코로넬 해전은 1810년 그랑포르 전투 이후 영국 해군 함대가 처음으로 패배한 전투였다.[19] 이 패배 소식에 영국 해군본부는 더베턴 스터디 제독이 지휘하는 새로운 해군 부대를 편성했고, 이 부대는 포클랜드 제도 해전에서 슈페에의 함대를 격파했다.[19]
전투에서 벗어난 ''글래스고우''는 남쪽으로 항해하여 마젤란 해협을 통과했다.[19] ''글래스고우''의 경고를 받은 ''캐너퍼스''는 포클랜드 제도로 돌아가던 중 두 차례 제어 불능 상태를 보고했고, 결국 스탠리 항 안쪽에 좌초되어 방어 포대 역할을 하게 되었다.[19] ''오트란토''는 희망봉을 돌아 아브롤호스 암초로 향했고,[20] 영국 해군본부는 생존 함선들에게 아브롤호스 암초로 집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아치볼드 스토다트 후방제독은 장갑 순양함들을 이끌고 ''디펜스''함의 도착을 기다렸으며, 북해의 그랜드 함대에 소속되어 있던 전함 HMS|인빈시블|1907|6}}과 HMS|인플렉서블|1907|2}}를 포함한 새로운 함대를 지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19]
슈페에는 승리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생존 가능성에 대해 비관적이었다.[21] 하원에 윈스턴 처칠이 제시한 패배에 대한 공식적인 설명은 "그는 ''캐너퍼스''와 함께 있는 한 즉시 적과 교전할 수 없다고 느껴, 자신이 파괴되더라도...그들에게 피해를 입히고...그들의 이후 확실한 파괴로 이어질 것이라는 믿음으로 빠른 함선만으로 공격하기로 결정했다."였다.[22]
11월 3일, ''샤른호르스트'', ''그나이제나우'', ''뉘른베르크''는 발파라이소 항구에 진입하여 독일 주민들의 환영을 받았다. 슈페에는 축하 행사에 참여하기를 거부했고, 꽃다발을 받았을 때 "이것은 내 무덤에 딱 좋겠군"이라고 말했다.[23] 그는 1914년 12월 8일 포클랜드 제도 해전에서 그의 함선에 탑승한 대부분의 사람들과 함께 전사했다.
5. 1. 대한제국에 미친 영향
6. 기념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주 빅토리아에 있는 로열 로즈 대학교에는 코로넬 해전에서 HMS ''굿 홉''(Good Hope)호에서 전사한 4명의 캐나다 사관후보생들을 기리기 위해 코로넬 기념 도서관이 있다.[24]
1989년, 칠레 코로넬의 마요 광장(Plaza 21 de Mayo, 21st May Square)에는 이 해전에서 전사한 이들을 위한 기념비가 세워졌다. HMS ''굿 홉''(Good Hope)호와 HMS ''먼머스''(Monmouth)호를 묘사한 두 개의 명판과 함께 중앙에는 1914년 11월 1일 코로넬 해전에서 목숨을 잃은 영국 해군 함대의 장교와 선원 1,418명과 사령관인 크리스토퍼 크래독(Christopher Cradock) 제독을 기억하며, 바다가 그들의 유일한 무덤이라는 내용의 스페인어 헌정 명판이 있다.
참조
[1]
웹사이트
Battle of Coronel
http://www.naval-his[...]
naval-history.net
2013-10-30
[2]
서적
Massie, 2004, pp. 203–204.
[3]
서적
Massie, 2004, p. 221.
[4]
서적
Massie, 2004, pp. 219–221.
[5]
서적
Massie, 2004, p. 221
[6]
서적
Massie, 2004, p. 219, citing ''Coronel and the Falklands''. p. 92.
[7]
서적
Massie, 2004, p. 239, citing Marder Vol II, p. 110.
[8]
서적
Massie, 2004, pp. 222–223.
[9]
서적
Massie, 2004, pp. 224–225.
[10]
서적
Massie, 2004, pp. 225–226.
[11]
서적
Massie, 2004, pp. 227–228.
[12]
서적
Massie, 2004, p. 229.
[13]
서적
Massie, 2004, p. 230.
[14]
서적
Massie, 2004, p. 233.
[15]
서적
Massie, 2004, pp. 234–235.
[16]
서적
Massie, 2004, p. 235.
[17]
서적
Massie, 2004, p. 232.
[18]
서적
Massie, 2004, p. 236.
[19]
서적
Massie, 2004, pp. 242–243.
[20]
서적
Massie, 2004, p. 242.
[21]
서적
Massie, 2004, p. 236, citing Pitt p. 65.
[22]
서적
Massie, 2004, p. 241, citing Churchill Vol I, p. 426.
[23]
서적
Massie, 2004, p. 237, citing Pitt pp. 66–67.
[24]
웹사이트
HMS Good Hope -- Canadian Midshipmen
https://livesofthefi[...]
Imperial War Museums
2020-09-04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